in 낙서장

소설

중고등학교 때,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근대/현대 시와 소설은 공부가 하기 싫었던 나에게 항상 좋은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든 선생님에게든 언어영역 공부를 하고 있다고 둘러 대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그 날도 공부하기가 싫었던 나는, 근대소설 모음집에서 김동인의 ‘붉은 산’ 이라는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삵’이 나오는 그 소설 말이다.

맙소사, 그런데 너무 재미있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읽었다. 소리내어 울 뻔 했는데, 그러면 왠지 부끄러워 끅끅 거리며 눈물만 하염없이 쏟아내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고, 온 몸에는 전율이 흘렀다. 애국가라니, 거기서 애국가라니…

겨우 눈물을 멈추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어렵게 추스린 후에야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붉은 산’에 대한 서평이 나왔다. ‘이 글의 주제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문학 작품을 정말이지 재미없게 만들어버리는 참고서 류의 설명이 아니라 그래도 나름 좋은 대학 교수님이 쓴 서평이라니 읽어볼 가치가 있겠군, 하며 읽기 시작했다.

서평의 다른 내용은 이제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이 한 문장이 나를 그토록 분노케 했던 것만 선명하게 기억날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감정 조절에 실패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서평은, 그 서평을 쓴 사람은 나를 모욕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렇다면 내가 쏟은 눈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감정 조절에 실패했다니, 소설에 완전히 몰입해서 나에게 그토록 강렬한 충격을 주었던 그 마지막 부분이 단지 감정 조절에 실패한 아쉬운 부분이라니.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공부한 사람의 분석이고, 또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평론가가 동의하는 부분이니 중고등학생을 위한 소설집에 서평으로 실린 것일텐데, 그러니까 아마 이 평론가의 말이 맞을텐데, 그럼 나는 뭐가 되는건가. 나의 그 눈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몇 번의 순간이 있었다. 내가 시와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에는.

우리집 책장에서 꺼낸 낡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라는 구절이 얼마나 감각적이고 천재적인, 그리고 아름다운 표현인지 엄마와 함께 논하던 중 1때, 그 순간.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단지 아름답게만 보였던 이 구절이, 사실은 천상병 시인이 고문을 겪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세상을 떠난, 그 천상병 시인이 남긴 문장이라는 사실을 국어 선생님께 들었던 그 순간.

일이 끝나시면 같이 집에 가려고, 아빠를 기다리다 심심해서 책장에 꼽혀있던 책 중에서 대충 아무거나 골라 집어든 소설 ‘아버지’에서, 딸이 적은 편지를 보면서 고통스러워 하는 정수를 보면서, 그러면서도 그 편지를 딸이 준 첫 번째 편지라며 간직하고 있는 그 정수를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숨기긴 숨겨야겠는데, 글을 읽으면 읽을 수록 자꾸 눈물은 흐르고, 그런데 글을 읽는 건 멈출 수가 없었던 그 순간.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에서 언어 영역 공부를 하면서, 내가 읽었던 그 글들이 ‘북간도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 ‘죽음에 대한 달관과 승화’ 따위의 ‘주제’ 라는 단어로 정리되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너희가 틀렸다고. 글이란 건 그렇게 한 줄로 정리되는게 아니라고.

김동인의 ‘붉은 산’ 역시 그런 맥락에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감정 조절에 실패했다니, 아니야. 당신이 틀렸어.

틀림이 어디 있겠는가, 문학에. 물론 그러하다만…

단지 나는 그 즈음부터 문학을 내 마음대로 읽기 시작했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글을 선택하고, 읽고, 이해했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운 글이 많았다. 하나씩 그런 글을 읽는게 나는 즐거웠다.

연구실이 이사를 하게 되어 짐을 정리하는데, 사놓고도 읽지 못한 책들이 제법 있었다. 모두 비문학이다. 철학, 우주, 프로그래밍, 평전, 역사… 문학이 아니라 비문학이라서, 그래서 내가 책을 사놓고 아직까지도 안읽은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든다.

소설이 한 권 있긴 하다. 오래전 헤어진 여자친구가 읽어보라며 빌려 줬던 소설이다. 받아서는 앞 부분을 조금 읽어보았는데 왠지 재미가 별로 없었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헤어지고는 미처 책을 돌려주지 못한 것이다. 이제와서 돌려주자니 ‘자니?’라고 문자를 보내는 모양새라 손발이 오글거려 그럴 수가 없고, 그렇다고 혼자 읽어보자니 읽고 나서 책이 좋으면 어찌하고 안좋으면 어찌할 것이며 또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뭐해서 놔두고 있었더니 그 책이 지금까지 이렇게 가만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글은, 쌓여 있는 책 속에서 한 권의 소설을 발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들어가야겠다.
요즘 날씨가 좋다.
따뜻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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