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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정의. 20대 후반 즈음부터 나의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는 단어다. 무엇이 옳은 일일까, 옳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이 책이 더욱 크게 다가온 이유는 아마도, 인간의 민낯을 평생 마주하며 그 안에서 정의를 고민해야 했을 판사의 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이 책을 감싸고 있던 커버에 적힌 손석희의 간략한 평 때문이었다.

“나는 문유석 판사 생각의 대부분과 그의 성향의 상당 부분이 나와 겹친다는 데에 경이로움까지 느끼면서 이 책을 읽었다. 이러면 훗날 내게 기회가 오더라도 이런 책은 쓸 필요가 없게 된다. 이 책이 그냥 그런 많은 책들 속에 묻히지 않기를 바란다.”

손석희, <JTBC뉴스룸> 앵커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지 말고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손석희는 자신의 한 마디가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아는 사람이고, 그 영향력의 무게 역시 잘 알고 있을 사람이다. 그런 그의 평가가 저러하다면 믿어볼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롤로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살아가면서 분명히 내 일이 아닌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들이 있다. 피가 거꾸로 솟는 순간들이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책없이 줄줄 흐르는 순간들이 있다. 잘난 과학이 그걸 거울 뉴런의 작용이라고 하든 옥시토신 호르몬의 분비라고 하든 갱년기 증세라고 하든 내 몸과 마음이 격렬하게 반응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데도 지하주차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공부하는 젊은이가 부잣집 사모님 앞에 잘못 없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이는 꼴을 보면 피가 거꾸로 솟아 앞이 아득해진다. 한남대교를 지날 때마다 십 년 넘도록 마주치는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현수막은 여전히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다. 그 현수막을 아이 아빠가 16년째 새것으로 바꿔 걸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모두가 경험한 순간이 있다. 눈앞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시퍼런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한 순간. 몸이 떨리고 무섭고 무력하고 울음조차 안 나오는 시간들을 경험하며 조금씩 깨달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평온한 일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 같은 것인지. 우리 하나하나는 얼마나 무력한지.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고 사회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리고 나와 아무 상관없어도 타임들이 고통을 당하는 옆에서 나 혼자 행복한 일상을 누린다는 것이 얼마나 죄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인지.
평범한 일상에서도 이런 순간들을 피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상처 주고 상처받아 피 철철 흘리는 사람들을 늘 만나야 하는 법정에서는 또 어떻겠는가. 솔직히 내가 쓰는 글의 출발점에는 ‘나같이 이기적이고 무심한 사람조차 자꾸 접하다보니 결국은 깨닫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더라. 하물며 나보다 훨씬 따뜻한 가슴을 가진 많은 분이 이런 일들을 보고 듣는다면 어떻겠나. 내가 겪은 것들을 알려드리기라도 하고 싶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보니 결국 모두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주의자인 ‘나’의 눈으로 본 세상의 여러 얼굴들이다. 나의 시선이 보편타당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사회에 살면서 내가 유독 먼 변방의 특이한 별에서 온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다. 그런데 불편듯 알고 보면 나와 비슷한 별에서 온 사람들이 꽤 많은데 단지 목소리 큰 사람들 사이에 묻혀 눈에 안 띄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용기를 내어 더 솔직하게 내 생각들을 털어놓기로 했다.
독자님들은 이제부터 어쩌면 낡은 일기장을 꺼내 읽어볼 때처럼 거칠고 두서없는 느낌이나 생각들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미리 말씀드리고 싶다. 사회에 나와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누구나 자기 몫의 아픔은 안고 살고 있더라는 거다. 굳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겠지만 나 자신의 몫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직업병 때문일까. 어떤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고통만큼은 평등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자도 권력자도 스타도 화려한 겉껍질 속에는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가득했다. 건강 때문에 가족 때문에 자식 때문에 때로는 자기 자신 때문에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 흔하디흔해보이는, 건강하게 자라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이를 갖고 키우며 사는 일들이 실은 얼마나 전쟁같이 힘든 일인지……
지금 힘들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드리고 싶은 한상궁 마마님의 말씀이 있다.

장금아. 사람들이 너를 오해하는 게 있다.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 모두가 그만두는 때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시작하는 것. 너는 얼음 속에 던져져 있어도 꽃을 피우는 꽃씨야.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

“네 능력은 뛰어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쉬지 않고 가는 데 있어”라고 격려해주면서도, 끝에는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라며 알아주는 마음. 우리 서로에게 이것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pp.11-14

시작하는 글에서부터 느껴지는 그의 시선과 태도, 그리고 훌륭한 문장력. 나는 고민없이 이 책을 집어들었고, 곧 이 책에 매료되었다.

개별 내용에 대한 나의 감상을 뒤로 하고 결론부터 우선 말하자면 최근 몇 년 새 읽은 책 중에서 가장 훌륭한 책이었다.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준 책, 그리고 동시에 이런 어른이 있어주어서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이제 학교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이 사회에 뛰어들어야 하는 내가 과연 이런 정도의 깊이와 통찰을 가진 사람들과의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거꾸로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이라는 리바이어던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집단 내에서의 서열, 타인과의 비교가 행복의 기준인 사회에서는 개인은 분수를 지킬 줄 아는 노예가 되어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사다리 위로 한 칸이라도 더 올라가려고 아등바등 매달려 있다가 때가 되면 무덤으로 떨어질 뿐이다. 행복의 주어가 잘못 쓰여 있는 사회의 비극이다.
고민의 출발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불행할까’다. 세계 최빈국에서 경제대국으로 일어선 기적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성취하여 평화적 정권교체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총에 맞거나 칼에 찔릴 위험 없이 강남역, 홍대 앞에서 새벽까지 젊은이들이 술 먹고 심지어 길바닥에 쓰러져 자기도 하는 몇 안 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객곽적 지표로는 적어도 세계 상위 20퍼센트 또는 10퍼센트 내에 드는 장점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가 싫어서 이민 가고 싶다고들 하지만 세계지도를 놓고 정말로 찬찬히 들여다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열몇 곳을 빼고는 살기 좋다 할 만한 곳이 별로 없다는 것이 유감스러운 인류의 현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한국인들이 힘들어하며 미래를 불안해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걸 두려워하고, 사회에 절망한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양극화, 빈부격차, 불평등, 취업난, 저성장. 그런데 지구 전체가 겪고 있는 이런 보편적 질환만으로도 힘든데 우리 사회 특유의 체질이 증세를 점점 악화시켜 우리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나는 감히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pp.22-23

‘헬조선’이라며 이민을 가겠다는 사람들을 두고, 대한민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세상에 몇 개나 되냐는 말. 흔히 보수층이 많이들 하는 말이다. 그 뒤를 이어 나오는,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룬 자랑스러운 나라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읽혔다. 보수층이 하는 말이라고. 그리고 이내 미칠듯이 부끄러워졌다.

지금의 시대가 아닌 너무나도 오래되고 낡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친일과 친북이라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낡은 프레임 위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따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저런 표현은 어떤 맥락 위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사회란, 이념이란, 가치관이란 그런 맥락 위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티브잡스가 말했듯이, 새로운 세상을 존재하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고, 흐름과 맥락을 무시해버릴 수 있는 능력은 젊은 층에게만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왜 ‘당신들 모두가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과 판단력, 지식을 갖추지 못한 것인가. 나는 왜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 않고, 그저 그들의 말을 취사선택 하는 것에 만족했던 것인가. 나이 오십이 다 되어가는 판사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라보는데, 이제 겨우 서른 된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가.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았다.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군대를 모델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상명하복, 집단 우선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의사, 감정, 취향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곤 했다. ‘개인주의’라는 말은 집단의 화합과 전진을 저해하는 배신자의 가슴에 다는 주홍글씨였다. 나는 우리 사회 내에서가 아니라 법학 서적 속에서 비로소 그 말의 참된 의미를 배웠다. 그 불온한 단어인 ‘개인주의’야말로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엔진이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경우 이 단어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기 시작한 것은 민주화 이후 겨우 한 세대, 아직도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왜 개인주의인가. 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다층적 갈등구조의 현대 사회에서는 특정 집단이 당신을 영원히 보호해주지 않는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라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전략적으로 연대하고, 타협해야 한다. 그 주체는 바로 당신, 개인이다.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야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여 이를 존중할 수 있고, 책임질 한계가 명확해지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에게 최선인 전략을 사고할 수 있다.

우리가 서구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개인들을 전제로 성립되어 있다. 우리 사회 존립의 근거인 가장 근본적인 사회계약, 즉 우리 헌법 질서의 근간이 그렇다. 이건 모두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지루할 정도로 상식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슬플 만큼 이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지 못한 이야기다.

pp.24-25

이 부분은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으로, 그리 새롭거나 인상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부분이 우리 사회가 가진 다양한 문제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건 짧은 시간 동안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다시 한 번 슬프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는 이 때문에 많은 비극을 겪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아군과 적군, 정의와 불의로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이들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심리를 투영하여 과잉 열광하거나 조금이라도 자기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면 배신자 취급을 하며 돌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하루하루를 분노, 절망, 투쟁, 당위만으로 채우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 가는 곳에 행복한 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다.

p.62

서른 즈음부터 나에게 있어 큰 고민 중 하나는,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각자 꿈꾸는 이상이, 지향점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건 서로 지향점은 같지만 접근법이 다를 것이라는 나의 근거 없는 믿음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서로 지향점이 같다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하고 조금씩 양보하면, 대화를 통해 최선의 결과와 합의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지향점이 다르다면 애초에 합의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합의가 되었다면 그건 미봉책이고, 서로가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충돌과 폭력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 아닌가.

이에 대한 해답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이 부분이 조금은 힌트가 될 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를 당위로 채우는 것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불행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끌고 가는 곳에 행복한 유토피아가 있을 리 없다.’

그런 어느 날, 2년 넘게 끌고 있는 사건 재판을 진행했다. 변호사 없이 ‘나 홀로’ 소송중인 아주머니의 하소연은 길고 길었다. 어느 정도 지나자 재판에 필요한 부분도 아닌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짜증도 나고 지치기도 했지만, 뒤에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자르면 불만을 제기할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들었다. 그것뿐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마친 아주머니가 갑자기 내게 절을 꾸벅 하는 것이 아닌가. 놀라서 쳐다보니,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그동안 이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 검찰, 법원을 여러 번 들락거렸는데 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것은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가슴속 한 맺힌 예기를 판사가 다 들어주니 이제 결과가 어떻게 되든 여한이 없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부끄러웠다. 난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건 원래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 과분한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난 감히 그때 맡고 있던 일을 전에 하던 일보다 작고 단순한 일로 여기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이리 절실하고 한 맺힌 일인데 말이다. 죽비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나는 경험이었다.

pp.64-65

대단한 정의나 철학이 없더라도,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흔히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이 은퇴할 때 하는 말이 있다. ‘팬 여러분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어렸을 때는 그저 상투적으로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도 가끔 느끼게 된다. 나의 작은 노력이, 선의가, 아니 그것도 아닌 그저 나에겐 너무나도 쉽고 당연한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큰 도움과 힘이 된 경험, 누구나 한 번 쯤은 겪어 보았을 일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불행하고 비참한 처지에 있는 젊은이들도 있음을 잊지 않는 일일 것이다. 비록 내 친구들, 주변 사람들 중에는 없더라도, 설령 전체 이십대 인구 중 현재에 만족하는 이들이 더 많더라도, 분명히 어떤 젊은이들은 백화점 주차장 바닥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당하고 있고, 종일 알바 후 1.5평 고시원에 누워 희망 없는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p.119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꼭 보았으면 하는 영화가 있다. 대형마트의 비정규직 계산원, 청소원들이 집단 해고에 맞서 노조를 만들어 싸우는 이야기, 영화 <카트>다. ‘해고’ ‘노조’라는 단어만 보고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 영화의 미덕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기’일 뿐 아니라, 수학여행비, 급식비를 못 챙겨주는 엄마가 미운 사춘기 아들, 그 아들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는데도 일자리를 잃게 된 엄마, 육아에 시달리는 싱글맘, 마트에서 일하면서도 계속 더 좋은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높은 벽만 실감하게 되는 이십대 구직 여성,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는 비정규직 ‘여사님’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갈등하는 정규직 남자 직원, 즉 우리로부터 결코 멀리 있지 않은 사람들, 이웃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어 울림이 더 크다.
(중략)
하지만 해법은 냉철한 머리로 찾아야 하더라도, 먼저 그 문제들이 실제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생하게 느껴보는 것과 단지 머리로만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인건비라는 숫자로만 존재하는 사람들과 그 돈 벌어서 자식 키우며 살아가는 이웃의 얼굴로 떠올리게 되는 사람들은 다르다. 후자를 떠올릴 수 있을 때 ‘해고 회피 노력’ ‘성실 협의 의무’ 등의 말은 비로소 제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중략)
청룡영화제에서 <변호인>으로 여우조연상을 탄 김영애씨가 정작 수상소감을 말할 때 <카트>를 언급하며 “처음으로 나름의 사명감을 갖고 촬영에 임했는데 사실 좀 서운하더라.”, “다른 좋은 영화도 많이 봐주시지만 <카트>도 좀 봐주시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진심이 담겨있는 안타까움이었다.
(중략)
애들을 국어학원에 보내보니 커리큘럼에 김동인의 ‘감자’,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황석영의 ‘객지’가 있었다. 물론 꼭 읽어야 할 작품들이지만, 수십 년 전의 빈곤, 노동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읽히면서 정작 지금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더 생생한 이야기들은 시험에 안 나온다고 외면하는 건 온당한 일일까.

pp.120-121

뒤통수를 한 대 제대로 맞은 것 같았다. 그 소설들이 노동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음을,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소설임을, 나는 머리로 알기는 했으나 가슴으로 공감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문학을 ‘시험에 나오기 때문에’ 공부한 것이 아니라, 나름 문학 자체에 심취해서 즐거움을 느끼며 공부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러게, 정말 그렇다. 30년 뒤에는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학생들이 국어 시간에 배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헌신적인 원장님과 선생님들 그리고 네다섯 살부터 초등학생, 몇 명의 중고생까지 여자아이들 20여 명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부모님이 안 계시거나, 계시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아이를 돌보기 힘든 가정의 자녀, 결손가정의 자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학교도 다니고 서로 함께 도우며 살아가는 가정공동체입니다.
말로만 듣던 판사 아저씨들이라니, 호기심이 가득하면서도 쭈뼛거리는 아이들. 한 동료 판사가 열심히 준비한 마술 몇 가지를 선보였더니 비로소 환호성이 터지더군요. 선물도 전달하고 다같이 앉아 피자도 나누어 먹고 서로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제게 무슨 할말이 있는 듯 머뭇머뭇하기에 할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했더니 “판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한 아이씩, 한 아이씩 제 주변에 둘러앉더니 아이들은 이것저것 물어보고, 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투어 저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판사에게 물어본 것은 어떤 것들일까요?

“사채업자가 깡패를 보내서 돈 갚으라고 협박할 때는 어떻게 해야 돼요?”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어 다치게 했는데, 물어줄 돈이 없으면 몇 년이나 감옥에 있어야 해요?”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내서 감옥에 가면 빚 다 갚을 때까지는 못 나오는 건가요?”

저는 어리석게도 이 작은 집에 흐르는 안온한 분위기와 밝은 아이들의 겉모습만 보고는 아이들이 짊어진, 여느 어른들보다도 가혹한 삶의 무게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에게서 가정을, 엄마와 아빠를 빼앗아간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돈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없이 아이들의 질문에 간으한 한 알기 쉽게 답해주려고 애쓰고 있는데, 아이들 중 가장 어려 보이는 네 살 정도의 아이가 제 주변을 맴돌더니 괜히 제 어깨도 만지작거리고, 눈이 마주치면 웃음을 보였습니다. 언니들이 하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나이도 아닌 이 꼬마 아가씨는 여자들만 사는 이 집에서,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아빠의 모습을 제게서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중략)

그후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 출연으로 유명해진 리틀 싸이 황민우군에 대해 어머니가 베트남 사람이라는 이유로 악플러들의 괴롭힘이 심하다는 기사를 읽으며 그 필리핀 법관의 눈물을 떠올렸다. <국제시장>의 덕수가 젊어 고생하던 시절,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고, 필리핀은 우리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였다. 필리핀은 6.25전쟁 당시 참전하여 백 명이 넘는 전사자를 기록한 나라이기도 하다. 베트남도 캄보디아도 결코 우리에 못지않은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들이다.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의 겉모습만 보고 가난한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수치를 모르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일이다.
2007년 7월 열아홉 살인 베트남 여성 후안마이가 마흔여섯살인 한국인 남편에게 무차별 구타당해 갈비뼈 18개가 부러진 채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6개월 전, 막노동을 하던 남편은 국제결혼 중개업체에 전 재산에 가까운 돈 천만 원을 주고 베트남에 가서는 수많은 여성들 중 후안마이가 한국인과 비교적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단 몇 분 만에 배우자로 선택한 후 당일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은 채 결혼생활을 했다. 후안마이는 죽기 전날 남편에게 아래와 같은 내용의 베트남어로 된 편지를 남겼다.

저는 당신의 일이 힘들고 지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저도 한 여자로서, 아내로서 나중에 더 좋은 가정과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당신은 아세요? 저는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당신은 왜 제가 한국말을 공부하러 못 가게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화하고 싶어요. 당신을 잘 시중들기 위하여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무엇을 마시는지 알고 싶어요. 저는 당신이 일을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것을 먹었는지, 건강은 어떤지 또는 잠은 잘 잤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 저는 한국에 와서 당신과 저의 따뜻하고 행복한 삶, 행복한 대화, 삶 속에서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 서로 믿고 의지하는 것을 희망해왔지만, 당신은 사소한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화를 견딜 수 없어하고, 그럴 때마다 이혼을 말하고, 당신처럼 행동하면 어느 누가 서로 편하게 속마음을 말할 수 있겠어요. 당신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고 한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일인지 모르고 있어요. (…) 물론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지만, 결혼에 대한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어요. 한 사람이 가정을 이루었을 때 누구든지 완벽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이해해야 돼요. (…) 당신은 저와 결혼했지만, 저는 당신이 좋으면 고르고 싫으면 고르지 않을 많은 여자들 중에 함께 서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아세요? 제가 당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호치민 시에서 일을 했어요. 당신이 우리집에 왔을 때 우리집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저는 가정을 위해서 일을 나가야 했고,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하지만 봉급은 얼마 못 받았지요. 저는 노동이 필요한 일도 했었어요. 그 일은 매우 힘들었어요. 그것이 가축을 기르는 일이든, 농작을 하는 일이든….. 가족들은 노동일로 벼를 심고 베는 일을 했어요. 베트남에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했어도 입을 것과 먹을 것만 겨우 충당할 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고, 단지 당신이 저를 이해해 주는 것만을 바랐을 뿐이에요. 저도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또 그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제가 베트남에 돌아가게 돼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이 저 말고 당신을 잘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기를 바라고 있어요. 당신이 잘살고 당신이 꿈꾸는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지길 바라요.
저는 베트남에 돌아가 저를 잘 길러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다시 처음처럼 일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의 희망은 이제 이것뿐이에요. 당신과 전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제가 한국에 왔을 때 대화를 할 사람이 당신뿐이었는데…… 누가 이렇게 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었겠어요. 정말로 하느님이 저에게 장난을 치는 것 같아요. 정말 더이상 무엇을 적을 것이 있고 말할 것이 있겠어요. 당신은 이 글씨 또한 무엇인지도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할 건인데요.

사건 당일, 술에 취해 귀가한 남편은 후안마이가 가방에 여권과 옷을 꾸린 채 외출복 차림으로 있는 것을 보고는 사기결혼을 당하여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격분하여 그녀를 살해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수치를 모르는 일 아닐까.

pp.125-131

속상하고, 아프고, 슬프고, 힘들고, 눈물나고, 화가나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안타깝고, 미안해서 글을 계속 읽기 힘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다른 사람의 슬픔을 함께 슬퍼할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서로 종종 충돌하는 가치인 자유와 평등을, 서로 이어주는 가치가 바로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 중 마지막 하나인 형제애라고 알고 있다. 바로 그 형제애란 공감이 아닌가.

언제부터인가 공감과 정에 기반한 판단이 아니라, 냉정하더라도 논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판단이 더욱 타당하고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 글을 읽으며 그런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연민이 결여된 논리라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이성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일까.

‘서울대 게시판의 신림동 비하 논쟁’ 기사를 읽었다. 서울대생들의 인터넷 게시판에 ‘신림역 근처엔 왜 이렇게 질 떨어지는 사람이 많나’ ‘패션과 외모, 머리 모양 등이 전반적으로 저렴해 보인다’는 글이 올라왔다. 이에 ‘누군가는 이 글을 보며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왜 못 하나’ ‘글쓴이는 왜 나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송두리째 폄하하는가’라는 비판이 있자, ‘왜 선비인 척하느냐’ ‘신림역에 모이는 사람들이 저렴하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반론이 나왔다.
(중략)
젊은 세대 일부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 의미 있다. 먼저 ‘불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 아니냐’는 항변은 요즘 인터넷 일각에서 흔히 보는 ‘팩트는 팩트다’라거나 ‘개취(개인 취향) 존중’ 운운의 논리다. 그러나 세상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 미국 백인 청년이 ‘슬럼가 흑인이 더럽고 불쾌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것은 인간을 노예로 사냥한 역사와 빈부격차, 불평등이라는 맥락에 대한 무지다.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그걸 생각한다면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더 심각한 것은 ‘왜 선비인 척하느냐’는 한마디다. 요즘 인터넷에는 ‘선비질’이라는 용어가 횡행한다.’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제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위선이 싫다며 날것의 본능에 시민권을 부여하면 어떤 세상이 될까.
(중략)
생각해보면 후배 세대의 위악은 선배 세대인 나 같은 사람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열린 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커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을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 사과한다. 기득권은 다 누린 주제에 극심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는 후배들을 싸잡아 욕하는 선배의 일원이기에 말이다.

pp.132-133

일베가 나타난 이후로 지금까지도 종종 쓰이는 단어가 바로 ‘팩트’인데, 그 팩트라는 단어가 나는 항상 불편해왔다. ‘선비질’ 혹은 ‘씹선비’와 같은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식의 설명을 보니 명쾌하고 시원하다.

그런데 가슴 한 편으로 불편한 것은, 나는 왜 이런 해답을 스스로 내지 못했나 하는 것이다. 불편했음에도 그 불편함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표현력의 문제가 아니라, 그 불편함의 본질을 내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명쾌하게 표현된 문장을 보며, 나는 왜 이렇게 짚어내지 못했을까, 그 결과 나는 저자가 짚어낸 것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점에는 전혀 도달하지 못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법관들도 말에 대해 주의하고 반성하기 위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는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데이의 ‘세 황금문’이다. 누구나 말하기 전에 세 문을 거쳐야 한다. ‘그것이 참말인가?’ ‘그것이 필요한 말인가?’ ‘그것이 친절한 말인가?’
(중략)
더 나아가 진심으로 친구의 비만을 걱정해 충고하고 싶다면 말을 잘 골라서 ‘친절하게’ 해야 한다. 옳은 충고도 ‘싸가지 없이’ 하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진심이 담긴 필요한 말이라고 해도 배려심 없이 내뱉으면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더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도 있다.

p.136

말이란 것의 무서움을 새삼스레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다. 일상에서의 대화조차도 쉽지 않음을 느낀다. 이 글에서 말하는 세 황금문이란 것은 정말 좋은 지침인 듯 하다. 깊이 새기자.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전체 생략)

pp.157-163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책을 최대한 빨리, 다 읽어봐야겠다.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은 걸로 하겠다”는 장그래의 가치관은 따져보면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잔혹한 논리이고 절대로 사회적으로 찬양되어서는 안 될 위험한 이데올로기다(누가 좋아할 논리겠는가). 그러나 저 말은 온몸을 내던지며 사회의 장벽에 맞서 싸워온 이가 자기 자신을 추스리며 했던 다짐이기에 정서적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시청자가 고졸 계약직 장그래의 도전을 응원하고, 그가 부딪치는 벽에 분노했다. 특기가 노력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누구든 응원받을 자격이 있다. 그리고 노력뿐 아니라 결과로써 능력을 증명했는데도 기회를 박탈당하는 시스템은 분노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중략)
물론 장그래는 평범하지 않다. 스펙은 없지만 직관이 뛰어나고 운도 따른다. 노력과 열망 자체도 보기 드문 재능이다. 현실에는 그중 아무것도 갖지 못한 ‘미생’들이 더 많고, 사회는 이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장그래 같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건 사회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사회에 공정한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야 노력하고 결과에 승복한다.

pp.164-165

(이후 ‘장그래에게 기회를!’ 파트 전체)

이 글에도 나온 것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적절한 기회나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 혹은 열심히 했지만 훌륭한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와 판단은 이미 서 있다. 도전과 노력, 열정은 그 결과와 상관없이 인정받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그래야 이 사회가 발전한다.

어려운 것은 최선을 다하지도, 열심히 하지도 않는 경우다. 그런 경우 그들에 대한 판단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들에 대한 사회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사회와 환경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보다 개인이 의지도 약하고 노력도 부족했던 경우 사회는 어디까지 그 개인을 지켜줘야 하는가. 만약 그 개인에 대한 결과가, 사회의 대우가 잔인하다면 그건 괜찮은건가.

예를 들어 취직을 하지 못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청년이 흔히 말하는 ‘스펙’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런 그는 결국 직업을 얻지 못한 채로 낙오되어야 하는 걸까.

그런 그가 열심히 노력한, 최선을 다한 이들보다 훌륭한 기회와 대우를 받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사회에서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그에게도 끊임없이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먹고 살 수는 있어야 한다.

그를 안타까워 할 수도, 탓할 수도 있지만 그를 비난하고 모욕해서는 안된다. 열심히 하는 것도 재능이다. 최선을 다하지 못할 수 있다. 노력조차, 더 나아가 의지조차 온전히 개인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것은 사회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지방 근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무렵, 그 국선변호인이 인사차 들렀다. 그 사건이 생각나서 내가 정리한 결론대로 물길 사용 문제가 정리되었는지 물었다. 변호인은 망설이다가 씩 웃더니, 사실 그때 내가 장황하게 설명한 법리며 판례 등은 아무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나중엔 아예 듣지도 않았다고 했다. 아니, 그럼 그날 도대체 어떻게 해결된 것이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날 내가 나간 후, 침묵이 흐르다가 노인 한 분이 일어나셔서는 “서울서 온 젊은 사람이 저리 애쓰는데, 이거 동네 망신 아니오? 그만 합시다” 그러시더란다. 다들 끄덕끄덕하더니 그만 거짓말처럼 서로 악수하고 눈물 흘리며 모든 게 해결되었단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감히 대단한 명답을 제시해 분쟁을 해결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적인 사람이 멍석만 깔아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중립성에 대한 신뢰를 얻기는 아주 어렵고, 잃기는 아주 쉽다. 오직 진심만이 그 신뢰를 얻는 열쇠일 것이다. 조정 달인의 비결은 아마도 이것이었던 것 같다.

p.174 ‘조정 달인의 비결’ 중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스타트업에 대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내 스스로 우리 사업 아이템에 대해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 최선을 다해 이 아이템을 시도해보고 그 결과를 보겠다는 의지를 가져야하는 것 아닌가. 내가 그렇지 못하기에, 내 주위의 사람들도 그러한 나를 느끼기에 지금 우리가 충분히 열정적이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닌가. 나에게 진심이 없기 때문에 함께하는 이들 역시 진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컴스켓이라는 동아리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 어떤 대단한 경험이나 지식도 없던 내가 만들어낸 그 ‘시스템’ 때문이 아니라, 컴스켓에 대해 내가 가졌던 그 ‘진심’ 때문이 아닌가. 그 진심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보였기 때문에 그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힘들 때 버틸 수 있게 해주고, 즐거울 때 모두가 진심으로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었던 건, 그 어떤 시스템의 힘도 아닌 ‘진심’의 힘이 아닌가.

그 진심이란 무엇인가, 솔직함이나 간절함이 진실이란 것의 전부가 아니다. 태도가 아닐까. 이 책의 앞쪽 인용에서도 밝혔듯 선의 혹은 친절함, 아니면 배려, 정의, 즐거움, 이상, 뭐 그런 것들이 아닐까.

아직 정리가 잘 안된다만, 분명히 그런 것 같다. 좀 더 정리를 하고,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일종의 분쟁 해결 분야의 하도급업자 내지 아웃소싱업체 CEO인 셈이었다. 조정의 필요성은 높았다. 재판은 힘들게 이기더라도 항소심에 항소하고, 다시 항소심 판결에 대해 대법원에 상고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조정 절차에서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져서 조정이 성립되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고 누구도 더이상 다투지 못하고 사건이 바로 종결된다. 삼세판 대 원스톱 서비스인 셈이다.

p.179 “‘머니볼’로 구성한 어벤저스 군단” 중에서

글쓰기 스킬과 관련해서, 마지막에 간결한 한 문장으로 ‘삼세판 대 원스톱 서비스인 셈이다’라고 한 번에 쉽게, 이후 내용의 이해를 위해 알고 넘어가야 할 핵심 개념을 간단한 문장과 비유를 이용해 굉장히 효율적으로 전달한 것이 인상적이다. 앞에서 자세하지만 길게 설명함으로써 자칫 구구절절 지루해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문장이 마지막의 저 한 문장으로 인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두고두고 활용할 수 있는 글쓰기 기법인 듯 하다. 한마디로 한 줄 요약이랄까?

부와 권력이 극소수에게 집중되고 인구의 대부분이 잉여인력으로 전락하게 되면 자본주의도 제대로 작동되기 어렵다. 노동자는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하다. 노동자에게 구매력이 없으면 첨단 기업이 무엇을 생산해도 소비될 수 있는 시장이 없게 된다.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기업들의 생산성 경쟁이 인간을 생산과 소득에서 축출하여 결국 시장 자체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딜레마다.
결국 1인 1표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자기파괴적인 자본주의의 폭주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인지 모른다. 우리 중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쓸모없는 노동력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미래에 보통선거 원칙이 우리의 미래를 공동구매할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밑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사석에서였지만 일정 교육 수준 이상, 또는 일정액 이상 납세한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분들을 보고 놀란 기억이 있다. 이런 사고방식이 확산되면 마지막 밑천조차 없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p.190

굉장히 흥미로운 분석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생산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사회와 기술을 발전시킨다. 그런데 생산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가 파괴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최근 논의되는 기본임금(?) 이슈와도 연관이 되는데, (아마도 내가 무지하기 때문이겠지만) 아직까지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지적인 것 같다.

지식기반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산업 구조가 이행한 사회에서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던 계층은 잉여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같은 저학력이라도 지역사회 기반이 탄탄한 백인들은 사정이 낫다. 슬럼가 출신 흑인들은? 계속 슬럼가에서 살 수밖에. 가정 환경, 교육 환경 모두 열악한 상태에서 고도화된 산업 구조에 걸맞은 고급 노동력을 갖추는 건 어려운 일이다. 주변에 온통 마약밀매자와 갱단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좋은 롤모델 자체도 없다. 아메리칸드림의 위기다.
미국정부 입장에서는 이들이 참 골칫거리일 거다. 사실, 정부 관료들이 휴머니스트들이어서 이들에게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많은 돈을 지출해온 것은 아닐 것이다. 이들이 궁지에 몰리면 살기 위해, 또는 자포자기 상태로 범죄와 소요로 사회를 공격하는 위협이 될 것이고, 이러한 리스크를 관리하는 데는 다시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기에, 일종의 보험료에 해당하는 비용을 미리 지출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다시 경제 구조 내에서 제 역할을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 기회, 노동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해결하기까지는 복잡한 난관을 거쳐야 해서 결코 쉽지 않다.

p.227

우리 나라의 산업 구조는 아직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완전히 이전되지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몸담고 있다. 하지만 우리 나라 역시 그 산업 구조가 빠르게 재편되는 중이고, 위의 첫 문장에서 밝히고 있다시피 우리 나라 역시 잠재적으로 가까운 미래에 직면하게 될 문제다. 아니, 이미 여러 사회 영역에서 문제와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외국인 노동자와 관련된 갈등이 있겠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드러내는 일부 남성들의 공격성 역시 특정 계층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저임금 노동력을 제공하던 계층이 사회적인 변화에 의해 자신들의 자리를 잃게 되는 과정에서 그 문제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당장 눈앞의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노동집약적 산업 구조에서 고부가가치 산업 구조로의 이행,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화하는 과정 위에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저임금의 노동력을 제공하던 계층을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미국 역시 훌륭한 모범 답안은 아니고, 북유럽 역시 이 책에서 밝히다시피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러한 계층의 사람들을 그저 사회가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숫자’로 다루어서는 안된다. 그 대안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이들이 숫자가 아닌 내 친구이고, 내 부모이고, 내 자녀임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해당 분야를 전공한, 열정적이고 이상적인 누군가’에게 그 해답을 찾는 일을 미루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고, 지금의 나에게 그럴 역량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보안을 연구하겠으니, 마치 내가 보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나마 다른 사람들에 비해 깊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누군가 이런 분야에 대해 나보다 깊은 이해도를 가진 젊고 의욕적인, 능력있는 누군가가 이 고민을 해주고 있기를 바라는 건 무책임하고 비겁한 것일까.

지면이 제한된 칼럼이라 갈등 구조의 한 면에 집중하여 쓸 수밖에 없었지만, 터키의 정치갈등 구조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시민의 자유, 다원주의를 억압하고 종교적 원리주의로 회귀하려는 독재자의 지지기반이 기득권층이 아니라 서민, 특히 발전과정에서 소외되어온 지방의 빈민들이고, 그 독재자를 반대하는 민주화 세력이 오히려 아타튀르크 이래 전통적인 기득권층인 지식인, 군부, 사법부 및 대도시 중산층이다.
태국의 비리 총리였던 탁신 지지기반인 레드 셔츠 서민들과 반탁신 반정부 세력인 중산층 이상 엘리트의 대립구도와 비슷한 점이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보적이고 자유를 희구하는 민중’의 이미지는 지식인들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자유, 가치상대주의, 다원주의 등의 서유럽적 가치는 엘리트, 중산층들의 선호이고, 서민들은 윤리적 보수주의, 종교적 원리주의, 배타적 민족주의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독재자들은 그런 정서를 잘 자극하여 적절한 가상의 적을 던져줌으로써 대중의 맹목적 분노를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활용한다. 이런 점에서 직접민주주의가 도입되고 국민들의 정치참여가 높아지면 자동으로 자유와 평등이 진전될 것이라는 기대는 슬프게도 실제로는 배반당한 경우가 많다. 히틀러부터 우리나라의 개발독재 시대까지 독재자들은 대의제를 무력화하기 위해 직접민주주의 장치를 잘 활용해왔다. 90퍼센트 이상의 투표율과 90퍼센트 이상의 찬성율을 기반으로 한 국민투표 결과는 실상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곤 했다. 그렇다면 정권의 여론 조작만이 유죄일까?
과거 선량한 미국 시민 다수는 노예소유권이 천부인권이라 믿었고, 버스와 식당에서의 흑백분리가 합리적인 차별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선량한 시민 다수가, 상당수의 여성들 자신조차 여성은 몸을 가리고 집안에만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pp.244-245

애초에 완전한 형태의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정의의 완전한 모습을 알지 못한 채 조금씩 그 베일을 벗겨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정의의 완전한 형태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시기와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런 형태의 질문은 과학철학의 질문들과도 비슷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란 완전한 형태의 정의에 가까워지는데 효과적인 장치일까, 혹은 시기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어 가는데 효과적인 장치인걸까?

또 하나, 만약 현재 사회에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하는 각종 이슈들, 이를테면 동성 결혼과 같은 동성애와 관련된 문제들의 경우 무엇이 옳은 것일까. 만약 완전한 모습의 정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것이 정의일까? 만약 정의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라면 지금의 이 시대에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이라면, 그 시기의 적당한 정의를 판단하기 위한 요건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슬람이든 가톨릭이든 고대 중근동사회를 배경으로 성립한 종교들이 전근대적 요소를 품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구약성서엔 폭력적 차별적 요소가 많지만 근대 계몽적 인도주의에 적응한 현대 기독교는 이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 예를 들며 종교는 인간사의 지적 사회적 흐름에 반응한다고 분석한다. 7세기에 쓰인 코란의 문제라기보다 이런 근대적 변용이 지체되고 있는 후진성이 문제 아닐까. 그렇다면 비판의 타깃은 시대착오적인 근본주의 종교지도자와 권력자들일 것이다. 타깃을 정밀하게 좁혀 이들을 고립시켜야 하는데, 반대로 20억 무슬림 일반을 자극해 앞서 말한 무슬림 트위터리안 같은 온건한 이슬람 세력을 고립시키는 것이 현명한 전술일까.

pp.248-249

이런 훌륭한 시야와 인식, 판단이 부럽다. 저자는 아마도 스티븐 핑커라는 사람의 책을 읽고 위와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거나 자기 주관에 대한 자양분으로 삼았을 듯 하다. 의식적으로 책을 좀 더 열심히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강한 책임을 기꺼이 질 수 있는 가치관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Anyone can be cynical.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Dare to be an optimist.

pp.266-269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고, 마치 이 책의 겉 표지에 붙어있는 손석희의 한줄평처럼 이렇게까지 나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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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ㅋㅋㅋㅋㅋㅋㅋ
    완전 공대라니
    역시 박박사님 통찰력 *-_-*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