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였다. 초등학교 5학년, 아니면 6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름 컴퓨터란 것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자그마치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책이 출판되는 과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원고를 열심히 써서 출판사에 보낸 후 반응이 좋으면 책을 낼 수 있을거란 제법 체계적인 생각을 했었다.
옆에 컴퓨터 책 몇 권을 쌓아놓고는, 워드 프로세서를 켜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열 세살짜리도 할 줄 아는 컴퓨터" 였던가, "열 세살짜리에게 배우는 컴퓨터" 였던가, 뭐 그런 식의 제목이었다. 그러고보니 초등학교 6학년 때였나보다. 열 세살이면 초등학교 6학년이다.
머릿말을 썼다. 일단은 컴퓨터와 친해지는게 중요하다면서, 타자연습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게임이나 채팅처럼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게 더 좋을것이라는 말을 적었던 기억도 난다. 그러면서 '저처럼 컴퓨터 시스템 자체에 관심을 가지면 더 깊게 알수 있답니다' 이런 대책없는
자신감자만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문장을 썼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는 1장 1절부터 본격적인 내용을 적기 시작했다. Windows를 잘 알기 위해서는 DOS를 이해해야 한다면서 뭔가를 적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바로 Windows에 대해서 적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되돌이켜보면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나름 진지했다. A4용지 세네장을 빼곡히 채워가며 내용을 적던 기억이 난다. 학교 숙제로 독후감을 적어도 A4 한장을 겨우 채우던 때였으니, 참 대단한 일이었다.
꿈많던 꼬맹이의 작은 도전은 아쉽게도 10여 일 만에 집필
(?) 흥미를 잃어버리면서 끝나게 된다. 그래도 열심히 적었던 그 파일이 우리집 컴퓨터 어딘가엔 있을텐데, 그 이후로 수도없이 컴퓨터를 망가뜨리면서 불가피하게 해야했던 포맷에 의해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때가 아버지께서 한참 논문을 적으실 때였던 것도 같다. 아버지께서 무언가 책을 보고,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논문을 적고 계신 것을 보면서 나도 흉내를 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렸던 나에게 항상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려 하셨던 아버지셨다.
그런 태도나 분위기를 보고 배우라는 의미였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할 만큼은 자랐던 나였지만, 아직은 공부보다 게임이 좋고 뛰어노는 것이 더 좋았던 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자연히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어린 나이기도 했다.
교양으로 들었던 '디지털 컨텐츠 기획론'이라는 수업의 최종 레포트를 쓰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웹 기획과 관련된 책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조차 1999년, 2002년에 출판된 것들이라 하루가 멀다하고 변해가는 웹에 대한 자료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2003년도의 버블 붕괴조차 겪기 이전에 나온 책들이니 말이다.
원하던 책은 찾지 못했지만, 도서관에서 나오는 내 손에는 조금 다른 성격의 책이 네 권 들려있었다.
'거미줄에 걸린 웹', '성공하는 웹사이트, 실패하는 웹사이트', '인터넷은 휴머니즘이다', '인터넷 철학'.
이런 분야에 참 관심이 많다.
인터넷과 우리가 사는 세상 사이의 상호작용,
인터넷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곳에서의 발견되는 웹의 특성,
결국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과,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 그리고 인터넷이, 이 세상이 나아가야할 미래에 대한 것들.
10년 전의 나차럼 책을 쓰고 싶어졌다.
내 장난감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컴퓨터다. 하지만 책의 주제는 좀 바뀌었다. 그 때는 컴퓨터 초보를 위한 입문서였는데, 지금은 컴퓨터 자체에 대한 내용이 아닌, 사회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다.
칼럼과 같은 형식으로 작은 글을 하나씩 모아갈 생각이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여진 글이, 언젠가는 정말 내가 책을 낼 때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밑그림이 되어줄거란 믿음을 가지고.
Posted by ipuris